올초에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새벽에 해뜨기 전에 집을 나서서 한두 시간 동안 산책하곤 했다. 집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다 가보았다.
평지를 걷는게 질릴 때는 산으로 갔고, 조금 더 멀리 가고 싶을 때에는 익숙지 않은 버스 노선을 타고 동네 구경하다 다시 집에 오곤 했다.
동네마다 특색이 있다. 특히 서울은 한 동네, 한 동네 넘어갈 때마다 그 특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내 생활권에 드는 성수, 왕십리, 제기동, 신당동만 보아도 스타트업/IT 핫플, 곱창 타운, 경동시장, 떡볶이타운 등 그 랜드마크가 뚜렷이 다르다. 대부분의 나의 아침 산책은 익숙한 길을 걷는데서 오는 권태로움 또는 새로운 길을 가서 헤매는 것 둘 중의 하나다. 새롭지 않으면 금방 질리고, 너무 새로우면 또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나 - 역시 중간이라고는 없다.
그 날은 내가 성북동 언덕 위 멀리에 위치한 가구 박물관에 오후에 갈일이 있어서 교통편도 알아볼 겸 아침운동도 할 겸 겸사겸사 새벽에 성북동으로 향했다. (길치인 나는 종종 중요한 일이 있거나 할 때 미리 답사를 한다) 도착해보니, 신문에서 본 재벌 회장님 집 같은 주택들과 어마 무시한 통유리로 된 차고에 고급차들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목적지였던 박물관 바로 앞까지 마을버스도 안 다니고, 인도도 안 놓아져 있어서 간신히 차 갓길로 올라갔다는 점. "아 이렇게 오기가 힘들어가지고 원... " 라고 생각하면서 내려오는데 우연히 길상사라는 절을 보게 되었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불교에 피상적으로나마 관심이 있었다. 많은 유적지들이 절인 우리나라 특성상, 절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공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구박물관까지 올라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길상사를 발견했으니 그날 산책도 성공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한 불자가 오랜 기간 고급 술집으로 사용했던 부지를 전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법정 스님께 맡기면서 길상사가 된 것이였다. 어쩐지 비범한 기운이 느껴지는 절이라고 생각이 들긴 했다.
사는 것이 팍팍하고 일자리가 점점 더 없어지는 요즘, 우스갯소리로 머리나 밀고 스님 할까와 같은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고, 나 또한 말한 적이 많다. 그런데 출가와 환속이 장난도 아니고, "날로 먹는" 직업도 아니거니와, 수행하는 삶이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가장 고된 싸움을 하겠다는 것인데, 내가 그간 입을 너무 쉽게 놀리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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