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빼고 모든 것을 다 겪은 세대

enattendant 2020. 11. 19. 19:54

Image credit: https://www.amazon.com/Assault-Harry-Mulisch/dp/0394744209

  내 인생을 상당히 힘들게 한몇 명 선생님들이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도 문화도 인종도 다른 뜬금없는 10대 후반의 나를 어떻게 감당했는지 신기할 따름. 그중 고 2 때 영어 선생님은 특히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전 세계 누구나 알법한 대학교를 두 군데나 나오시고 H 로스쿨 면접날 아침 이상한 어떤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면접을 보러 가지 않고, 그 길로 H 교육대학원에 등록, 아프리카에서 교육봉사를 하곤 돌연 모로코의 국제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신기한 케이스이다. 여러 모로 우리를 가르치는 일보다는 뉴욕의 핫한 문학서클에서 평론을 하시거나, 교육정책을 짜고 계시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릴 법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년 안 계시다 미국으로 돌아가시긴 했다)

 

소설이라고는 거의 안 읽는 나에게 그때 당시에 읽었던 영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은 그래도 내 세계관에 약간은 깨우침을 준 것 같다. 그때 당시 영어 교과의 약 5분의 1 정도는 선생님이 자율적으로 짤 수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는 이름을 들으면 알 것 같으면서도 막 유명하지는 않는 책들 위주로 선정을 하셨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하리 뮐리스 (맞는 표기법인지 모르겠다)라는 네덜란드 작가의 <The Assault>를 소개하고자 한다.

 

워낙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줄거리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 보다는 이 책의 중요한 두 가지 소재를 짚어볼만 하다.

1. 문학적 장치로서의 "어둠"

2. 물과 파도의 메타포 

 

전쟁 이후의 트라우마를 안톤이라는 주인공이 어떻게 해쳐나가는지, 또 어떤 기억들이 그를 평생 동안 괴롭게 하고 죄책감에 몸서리치게 만드는지에 대한 책이다. 그 괴로움의 서사에 어둠과 물에 대한 메타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우리 세대가 너무도 공감이 가지 않는 소재 아닌가? 사실 우리 위에 위에 세대도 한국전을 겪었지만 그렇게 대화 주제로 자주 나오지도 않고, 역사 다큐에서나 무한 반복되고, 수업 프로젝트 주제로 나오는 "연구 대상"에 가깝지 내 삶의 문제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내가 지금 분쟁지역에 살고 있지 않고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는 매우 안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어서 이런 얘기가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다. 

 

책 머리말에 이런 문구가 있다:

 

"By then day had broken everywhere, but here it was still night - no, more than night."

 

-Pliny the Younger, Letters, IV, 16

 

대략 번역해보자면, 

 

"그 시점에는 온 세상이 다 밝아졌지만, 이곳은 여전히 암흑이었다 - 아니, 암흑보다도 더 했다"

 

전쟁만큼 물리적으로 극적이고 눈에 보이는 적군이 있는 형태의 싸움이 아니더라도 2000년대 이후의 세계는 전염병, 경제 위기, 무한 경쟁, 심지어 선착순 싸움에 들기 위한 치열한 줄 서기로 얼룩져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살기, 냉기, 또는 매우 피곤한 기운이 주로 감지되고 온기는 아주 가끔 볼 수 있다. 지금 이곳이 부디 "암흑보다도 더 한 곳"이길 나는 바라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잃어버린 코로나 세대로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