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연말
뉴스나 게시판에서 느껴지는 사뭇 살인적인 눈치게임과 살벌한 분위기는, 막상 나가보면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어제는 암묵적 버거 동호회 (나와 같은 단과대 친구, 미륵 제니 펄 팍 - 이 친구는 문이과를 넘나드는 복전 3개를 하는 무시무시한 친구다...) 4차 회동을 성수동에서 가졌는데, "넛츠 버거"라는 곳에서 피넛버터가 좔좔 흐르는 버거 하나씩이랑 그 친구는 오레오 셰이크, 나는 버드와이저, 카스 하나씩 마셨다. 첫눈의 그 미끌미끌하면서도 아슬아슬한 낭만, 그렇게 춥지 않은 초저녁 공기, 생각보다 북적이지 않았던 성수 다 좋았다. 미륵 제니펄(Jennifer) 팍은 명동 신세계 백화점 본점에서 살 향수가 있다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따라갔다. 백화점 본관 앞에는 꽤나 멋진 조명 장식을 해놓았다. 그 조명과 화려한 전광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각도 저 각도 이 포즈 저 포즈 찍으며 부산스러웠지만, 그 특유의 연말 분위기가 나서 좋았다. 가족, 친구, 연인 단위로 나온 사람들... 타인들의 대화에는 간혹 유머 포인트가 있었다. 뭐 예를 들면, 화려한 조명을 두고 "정용진이 좋은 일 했네"와 같은.
연말 분위기는 참 뭐라고 설명할까 - 추운데 따뜻하고, 설레는 축제 분위기여야 하는데 코로나,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썩 제대로, 눈치 안 보면서 즐길 수가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오미크론... 과 2년째 이제 3년 차에 접어드는 코로나 사태를 두고, 괜히 "코로나 때문에" 생사에 지장도 없을 고작, 아무 실속 없는 연말 분위기 따위 느끼지 못했다고 징징될 나이나 개제는 아니다.
여하튼.
사실 미륵이는 나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 19년도 여름에 처음 알게 된 친구였는데, 나이 차이도 조금 나는 데다가 일(?) 같은 걸로 만나서 쭉 존대하다가 내가 제발 말 편하게 해달라고 해서, 이제야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연장자(?) 입장이 되어보니 친해져도 재빨리 반말을 쓰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편해지면 저절로 반말이 튀어나오겠거니 생각하고 있다. 미륵 쓰는 나에게 생일 선물을 2개나 줬었는데,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또 종이백을 내밀길래 나의 그 또, 선물은 좋아하지만 받았으면 꼭 되돌려줘야 하는 성향 상 , 본가 집 주소 카톡으로 날려놓으라고 했고, 그 핑계로 나도 오랜만에 크리스마스 엽서 & 소포로 뭘 보낼까 행복한 고민 중이다.
어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사실 요즘 드는 생각은 "인간관계 고민을 한다는거 자체가 살만한 것이다"라는 거다. 사치일 수도 있고. 코로나 시대에 더더욱 내 사람들, 내 가족, 가까이에 있는 내 친구만 챙기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대면으로 만날 기회나 여유가 적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덜 연연하기로 했고, 내 시간과 일정과 체력에 무리를 줘가면서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만 하지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시간 내어서 보려고 하는 편이긴 하다. 해가 거듭될수록, 아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그 친한 정도도, 보는 주기도, 만나야 할 명분도, 서로 삶의 상황도 다 다를 테니, 우리가 "인간관계 고민"이라고 하는 것 일터이다. 어렵고 힘들고 불편하니까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으니, 노력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니 자주 보게 되지 않는 것이다. 일이나 혈연으로 묶여 있지 않는 이상, 누구든 내가 만날 수 있는 빈도와 깊이를 정할 수 있고, 내가 노력하는 한도 내에서 잘 풀리지 않으면 그만이다.